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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콘텐츠 REPUBLIC OF KOREA NAVY

손원일 제독

출생 및 소년 시절

손원일사진_1 손원일 제독은 1909년 음력 5월 5일 평양에서 부친 손정도 목사와 모친 박신일 여사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일제강점기, 상해 임정의 의정원 의장을 지낸 인물로, 조국 독립을 위해서 평생을 바치신 분이셨다. 그가 6살이 되던 해, 부친이 서울 정동교회 담임목사로 오면서 손원일은 정동교회생활을 하게 된다. 이 시절 부친 손목사는 원일에게 "우리 민족이 나라를 잃게 된 것은 오로지 게으르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하곤 했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이는 어린 원일에게 성실과 근면을 심어주는 말이 되었다. 손목사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을 하자 어린 원일과 평양에 남은 가족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고, 원일은 일제 폭압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키우게 되었다. 손원일이 원광중학교 졸업반 때 아버지인 손목사는 세 남매를 불러 앉힌 후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목적과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우리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간절히 독립을 바라지만 일본이 곧 망하거나 금방 독립이 성취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상당한 기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으로 어쩔 수 없이 떠돌아다니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천대는 받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 개인이 실력을 갖춰 나라의 힘을 키워야 할 것이다. 앞으로는 과학사회와 산업사회가 전개될 것인데 그 때는 개인의 실력과 능력이 가장 중요하게 될 것이다. 어차피 우리 세대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되므로 너희 세대들이 각 분야에서 최고 실력자가 되어야 하느니라." 어려서부터 유학공부를 하여 과거 시험을 준비했었던 손정도 목사는 기독교와 접하면서 본격적으로 서구의 선진문물과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는 시대적 상황을 인식한 선구자였다. 손원일은 이른바 전통을 딛고 서서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를 서구 선진국처럼 만들 수 있을까를 평생 동안 고민했던 선구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훈도를 받고 자랐던 것이다. 그때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실력 제일주의´, 장차 동양사회도 서구처럼 ´과학사회´와 ´산업사회´로 변화할 것이라는 역사 발전사관은 소년 손원일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이 때문에 아버지 손목사의 사망 이후 손원일은 ´너희는 각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자가 되어야 하느니라. 그것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라는 평소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견문을 넓히고 언제나 공부하는 자세로 최선을 다하였다.

바다로의 첫발

손원일사진_2 청년 손원일은 길림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유치원에서 6개월 동안 어린이들을 가르치다가 대학 공부를 위해 1926년 가을 상해로 갔다. YMCA 기숙사에서 체류하면서 입학할 대학교를 찾고 있던 중 어느 날 상해 항구를 드나드는 군함과 상선들을 바라보던 중 온 무릎을 치게 하는 생각이 솟았다. '우리 민족이 번영할 수 있는 지름길이 바다에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손원일은 이때부터 다른 길은 아예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해군의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중국 해군에 입대하여 항해술을 배우려 했으나 입대할 방법이 없었다. 바다에 대한 가치와 해군에 대한 동경을 떨칠 수 없었던 그는 해군이 아닌 일반 대학교에서 항해술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상해의 중앙대학교 항해과에 지원하여 합격했다. 대학생이 된 손원일은 1927년부터 항해학을 공부하면서 언젠가는 조국이 광복되면 해군을 창설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손원일은 대학교에서 3년간의 이론학습을 끝내고 1년간 항해실습을 위해 1930년 초부터 상해와 광동 간을 왕복하는 국영회사인 초상국 소유의 3,000톤급 연안 화객선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실습항해가 끝난 후 독일 상선 하벤슈타인, 화객선 람세스, 중국 초상국 소유 여객화물선에서 약 4년 6개월의 승선생활을 하면서 항해술 습득은 물론 국제적인 안목을 넓히고 세계의 문물을 습득했다. 1934년 여름, 잠시 휴가를 내어 경성(지금의 서울)에 사시는 큰 누나 손진실을 만나기 위해 귀국했는데,


손원일사진_3 일본 경찰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상해 임정의 비밀 연락원의 임무를 띠고 잠입했다는 혐의로 그를 체포하고 2개월 간 혹독하게 고문하였다. 결국 무혐의로 풀러난 손원일은 다시 중국으로 떠났고 무역회사인 동화양행 상하이 지사장으로 근무하며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는 수입의 일부를 충칭의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으로 보내는 등 항상 조국의 광복을 먼저 생각했었다.



해군 창설 초기

손원일사진_4 손원일 제독은 조국 광복과 더불어 귀국하지만 당시 사회는 광복의 기쁨은 잠시이고 수많은 단체와 사상의 대립으로 무척 혼란스러웠다. 이런 가운데 손 제독은 우리 조국이 바다를 통해서 세계로 뻗어나갈 시발점인 ´해군창설´을 결심하게 된다. 먼저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을 규합하고, 유명 인사들을 찾아가 해군창설에 관한 그의 포부를 피력하였다.

마침내 1945년 8월에 해군건설의 초석인 해사대를 결성하게 되고, 이어서 미군정청과 협의 끝에 1945년 11월 11일에 한국해군의 모체인 해방병단을 창설하였다. 해방병단 창설 초기, 인원 및 재정적 어려움으로 한 끼 식사조차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운영상의 어려움이 많았지만 손 제독의 탁월한 협상력과 리더십으로 조선 수군이 폐지된 지 51년 만에 이 땅에 다시금 해군 탄생의 신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손원일사진_5 손 제독은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1946년 1월 지금의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인 해군병학교를 창설하여 초대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직접 생도들에게 항해술을 가르치는 등 장교 육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창설 초 우리 해군은 군함이라 할 만 한 배는 한 척도 보유하지 못했다. 이에 손 제독은 군함 인수를 위해 미국, 일본과 협상을 시도하여 1948년 까지 총 37척의 함정(건조 1척, 인수 36척)을 획득하지만 이중에는 소해함, 지원함과 같은 비전투함이 고작이었다. 전투함 인수를 위해 고심하던 손 제독은 자신을 위원장으로 하는'함정건조기금각출위원회'를 결성하여 모금운동에 들어가고, 해군장병 및 해군부인회 더 나아가 일반 국민들의 성금과 대통령의 하사금을 합쳐 총 6만 달러를 모금할 수 있었다.

손원일사진_6 손 제독은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서 온 국민과 해군의 꿈인 전투함 4척을 구입하였으며, 이때 구입한 백두산함은 6.25전쟁시 대한해협 해전에서 눈부신 전과를 올리게 된다.





손원일사진_7 조선해안경비대가 국군으로 편입되면서 손 제독은 1948 년 12월 15일 대한민국 초대 해군참모총장의 직위에 오르게 된다. 참모총장으로서 충무공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그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 몸을 삼가 바치나이다." 라는 표어를 내걸고 장병들에게 구체적 실천지침을 지시하였으며, 4 · 3사건 및 여 · 순사건의 진압과정에서 해병대의 필요성을 실감하여 1949년 4월 15일 신현준 중령을 사령관으로 진해에서 해병대를 창설하게 된다.




6ㆍ25전쟁시

손원일사진_8 6 · 25전쟁 당시 손 제독의 가장 큰 업적은 인천상륙작전 참가다. 이 작전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영흥도와 덕적도 두 섬을 탈환해야 하는 선행과제가 있었다. 이에 손 제독은 이희정, 함명수에게 섬탈환을 지시했으며, 마침내 1950년 8월 18일과 20일에 두 섬을 탈환하게 된다. 또한 손 제독은 상륙작전부터 9 · 28 서울 수복작전까지 직접 전장에서 우리 함정과 해병대를 진두지휘했으며, 서울 수복작전에서는 국군 최고 지휘관으로서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 라는 포고문을 발표하여 전쟁의 상흔에 고통 받는 서울 시민들에게 큰 희망을 선물했다.

한편, 손 제독은 충무공 이순신과 같은 전쟁 중에서도 내일을 준비하는 선각자였다. 해군력 증강을 위해 PF(호위함)을 추가로 인수하는 한편 군종제도의 도입, 전사편찬실 및 해군음악대 등을 발족하여 군 사기 진작과 현대화된 군 조직체계의 바탕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손원일 제독은 평소 신사도 정신을 강조하였으며 이는 예의, 정직, 겸손을 말하는 것으로 오늘날 대한민국 해군의 정신적 지표로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국방장관 시절

손원일사진_9 1953년 6월 전역 이후, 손 제독은 대한민국 제5대 국방부장관이 되었다. 국방부장관을 맡고서 맨 처음 부딪친 난관은 정전협정이었다. 손 제독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정전 반대가 우리의 의지만으로 성취될 수 없는 상황임을 설명하고, 정전협정에 옵서버(참관자)만 보낼 것을 이 대통령에게 강력하게 건의했다. 이런 손 제독의 노력으로 외교적 마찰을 피할 수 있었다. 또한 국방부 기구를 대폭적으로 개편하는 한편 연합참모본부를 설치하여 육 · 해 · 공군을 연계한 협조를 도모했다.

재임기간 동안 능숙한 외교수완을 발휘하여 막대한 군원을 획득함으로써 국방력 증강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행정면에서도 국립묘지(지금의 현충원) 창설, 군목제독의 활성화, 국방대학원 창설, 국내외 위탁교육제도의 신설 등 인재양성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초대 서독대사 시절 이후

손원일사진_10 국방부장관을 사임한 후, 1957년 6월 27일 주 서독공사 임명장을 받고 독일로 떠나게 된다. 부임한지 약 1년 후 주서독공사관은 1958년 8월에 대사관으로 승격하게 된다. 재임기간동안 국제원자력기구(IAEA) 정기총회 참석 및 1960년 4월에 제2차 유엔해양법회의 등 각종 국제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국제사회에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는 데 공헌하였다. 또한 유럽국가는 물론 카메룬, 모로코 등과 외교관계를 성립시켰으며, 재임 3년 동안 눈부신 외교활동으로 국위선양에 크게 기여하였다. 손 제독은 1960년 대사직에서 사임한 후 1976년 까지 한국재향군인회, 아시아반공연맹, 한국홍보협회 등의 단체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는 등 한국을 홍보하는데 박차를 가한 게 된다.

그러던 중 1973년 8월에 타이완 중화학술원으로부터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는 등 노년에도 불구하고 학업정진에 혼신의 힘을 쏟는다. 하지만 평소 지병인 신장병으로 7년여의 투병생활 끝에 결국 1980년 2월 15일 71세로 생을 마감하고 국립묘지에 영면하게 된다. 임종을 앞두고 손원일제독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사랑하는 내 조국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며 내가 한 일들이 비록 미흡하고 아쉬운 점도 많았지만 그러나 나는 나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나도 헌신했지만 건군 초기에 나와 함께 일한 동지들을 잊을 수 없으며 그들은 누구보다도 바르고 굳건한 신념으로 해군을 만들어 보려고 힘써왔고 오늘날의 대해군의 발전에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고 확신한다. 또 우리는 동족상잔의 전란을 몸소 겪었으며 일제의 탄압과 그 무서운 고문도 직접 겪었다. 따라서 바라는 것은 이 땅은 물론 세계 어느 곳에서도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당의 학정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또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피로써 싸워준 UN군의 고귀한 희생에 감사해야 한다. 내 나라를 도로 찾으려고 고귀한 생명을 바친 우리 조상들의 사무친 한과 나라를 지키려고 싸우다 산화한 장병들의 넋과 한을 잊지 말고 다시는 내 조국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잘 지켜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